History of Korean Community in Washington DC
워싱턴에 첫 발을 디딘 한국인은 조미수호 통상조약 (1882년)을 맺은 후에 미국 워싱턴을 방문한 조선의 보빙사절단 일행이었다. 이것은 또한 한국인이 미국 땅에 디딘 첫 발이기도 하다. 이로부터 한일합방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주미조선공사관이 문을 열었고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된 곳도 이곳 워싱턴이었다.
1883년 보빙사절단의 일원으로 워싱턴을 방문한바 있었던 변수는 민주호와 함께 1887년 워싱턴으로와 매릴랜드농대 (현 매릴랜드 대학)에 입학한다. 이 당시 총학생수 46명 변수와 민주호만이 외국인이다. 변수는 입학한지 4년만에 학사학위를 받고 농무성에 취직한다. 그후 1891년 열차사고로 32살의 나이로 객사하고 만다.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조선의 독립과 민주주의 발달에 지대한 공헌을 한 서재필이 1888년 워싱턴에 왔다. 서재필은 한문과 일어에 능통하였던 덕으로 당시 총감부 도서관에 동양 의학서적 5철권이 소장되어있고 번역사를 구하기에 이곳에 취직을 하게된다. 1884년 그는 콜롬비안 대학교 (현 죠지워싱턴 대학)의 의학부에 입학하여 그후 1892년에 한국인으로 최초의 의학사의 학위를 받았다. 서재필이 28세 때이다. 1890년에 그는 미국 시민으로 귀화하는데 이는 한국인 최초의 시민권 취득자라고 할 수 있다. 서재필은 그후 뮤리엘 암스트롱양과 결혼을 하는데 이 역시 한국인 최초의 미국인과의 국제결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인종차별 등의 이유로 생활고를 겪다가 그는 한국에 가서 자유사상과 민주주의를 계몽하기로 결심하고 미국인부인을 데리고 1895년 한국으로 돌아간다.
이승만은 배재학당을 졸업 기독교를 믿고 독립협회에 가입하는 등 개화에 앞장서다 황국협회의 무고로 투옥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민영환의 주선으로 풀려난 후 1904년 도미하여 미국정부에 일본의 한국침략저지를 호소하였다. 그러나 별 효과가 없자 죠지워싱턴에 입학하여 졸업하고 하버드에서 정치학 석사, 프린스턴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
1942년초 주미 외교위원부는 한미협회, 재미한족 연합위원회와 힘을 합쳐 한족대회를 워싱턴에서 소집하였다. 이를 미국 매스컴에서는 관심 있게 보도하였고 동년 7월 동양과 미주한인들에게 방송으로 모든 민족이 단결하여 세계 제2차대 전에 동참하고 일본을 물리치자는 내용의 메시지를 전한다.
1945년 해방후 처음 워싱턴에 도착한 한국인은 Johns Hopkins병원에 연수차 의사 9명과 같이온 최제창이었다. 그후 1949년 대한민국대사관이 개설되고 동년 매사츄세스애브뉴 현 한국영사관 건물을 10만 불에 사들여 구색을 갖추게 된다.
한반도에서 6.25의 참화가 일어났던 워싱턴에는 도합 22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었다. 대사관 직원과 가족 7명, 교포와 학생 15명이 전부였다. 그 후 1950년 12월 6.25로 인하여 서로 고국의 정보를 교환하고자 한인들의 모임이 만들어져 매주 토요일에 모이는 “한인 친목회”가 결성된다. 이는 워싱턴한인회의 맥아라고 볼 수 있다. 이후 1960년대 초에는 한인의 수가 500명 정도로 늘어났고 그 후 계속 한국인의 도미가 늘어나 현재는 워싱턴 한인수가 공식적으로 15만 명 정도 된다고 한다.
워싱턴에 한국인들이 밀집하는 지역은 버지니아의 페어팩스 카운티와 메릴랜드의 몽고메리 카운티다. 두 카운티 모두 훌룡한 공립학교 시스템이 있어 자녀의 교육을 중시하는 한국인 부모들이 선호하는 카운티다. 버지니아 전체 한인 인구의 반 이상이 패어팩스 카운티에 살고 있으며 이중 페어팩스의 애난데일지역과 센터빌지역은 한인 상업의 밀집 지역이고 주거지역으로는 패어팩스(시)와 센터빌이 최대의 한인 밀집 주거지역이다.
*이상은 워싱턴 한인회에서 발행하고 채영창씨가 편집한 워싱턴 한인사에서 발췌하였습니다.